지난 주말에 부산엘 내려갔었더랬습니다. 어머님 환갑이셔서요.
언제나 하는 일 없이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저입니다만 요즘은 회사에서 위치가 바뀌어서 좀 더 바쁜데...
어머님 일생에 두번 오는 날도 아니고 해서 무리를 해서 집사람이랑 애기까지 데리구 내려갔지요.
지난 추석때엔 차를 몰고 내려갔다가 귀경에 무려 20시간을 차에 갖혀 있어봐서.. 이번에는 차를 끌고 갈 생각은 애초에
버리고 내려가는 거랑 올라오는 거랑 모두 KTX를 끊었습니다. 왕복 두장씩 끊으니 거의 20만원 돈이더군요. 그냥 눈
질끈 감았습니다. 하긴 차를 몰고 다녀와도 어차피 십수만원은 깨지는 겁니다만...
뭐, 내려갈 때는 잘 내려갔습니다. 첨 타보는 KTX의 좌석이 낸 돈에 비해서는 무쟈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빠르니깐 뭐.. 경유역이 적은 넘으로 끊으니 두시간 반 정도밖에 안걸리더군요. 하지만 그 빠르다는 것도 성남
집에서 서울역, 또 부산역에서 부산집까지 가는 시간까지 치면 차 끌고 가는 것과 거의 비슷해져버리더군요.
하긴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금요일 오후에 내려가서 이틀간을 잘 쉬었구요. 이제 얼굴이 쪼글쪼글해져가시는 부모님이 제 아들넘 재롱에 즐거워하신
것만으로도 왕복 열차비는 들일만 했다 싶었습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일요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시간이 10시였거든요. 그래서 아홉시 좀 안되어서 부산 집을 나섰습니다.
부산 집에서 원동 톨게이트로 도시고속을 타면 부산역까지 20분 정도면 충분하니까 꽤 넉넉하게 나선 거지요.
아들넘을 품안에 안고, 집사람을 이끌고. 그런데 나오자 마자 황당한 장면... 30분쯤 전에 담배피우러 나갔을 때만 해도
안왔던 눈이 펑펑 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와 부산에서 눈을 다 보다니... 하고 신기한 마음 뿐이었죠.
2년전에 부산에 폭설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얼핏 나기는 했지만 지금 내리는 눈이 다시 폭설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들더군요. 제가 보지 못한 2년전의 폭설을 제외하면, 부산에서 눈다운 눈을 본 것이 제가 국민학교 2~3학년?
그때쯤이었으니까 부산에 눈이 온다고 해봤자 즐거워할 일이지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거든요.
그런데 그 일요일 아침에, 골목길을 지나 찻길까지 내려올 때까지 눈이 계속 내리네요? 그것도 펑펑...
휘리릭~ 바람까지 점점 심해지더군요. 그래도 심각하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한대도 안오네요?
어라~ 싶었죠. 눈이 좀 많이 오니 택시들이 언덕길을 잘 못올라와서인가보다(제 부산집의 동네가 좀 산골짝에 있슴다)라고
생각이 드니, 엇? 그럼 내려가기도 장난이 아니겠네 싶었습니다.
10분쯤 택시를 기다리다 열차시간에 늦겠다 싶어서 아무거나 버스를 집어탔습니다. 일단 평지까지 내려가면 별 문제
없겠지 했죠. 근데 어? 내리막에서 경사가 좀 심해지니까 버스기사가 겁을 집어먹더니... 못내려가겠다고 버스를 세워
버리는 거 아닙니까. 길바닥을 가리키면서 다 얼어붙었다고 빙판이라나.. 못내려간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서울에서 꽤
오래 살아본 저야 반질거린다고 다 빙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버스기사를 설득할 방법도 없고...
그래서 버스를 내렸습니다. 아들넘을 안고, 집사람을 뒤에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내려보니
펑펑 내리는 눈에 몰아치는 바람이 합쳐져서 눈보라가 되어있더군요. 평지 큰길(해운대-동래간 도로)까지 걸었습니다.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걸었는데.. 아들넘을 안고 있으니 미끄러질까봐 더 조심하느라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10분 정도를 걸으니 눈이 안경에 얼어붙어서 앞이 전혀 안보이더군요. 어떡하든 열차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을 늦추지도 못하고.. 안경을 벗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 수밖에 없었죠.
이 폭설에 열차 놓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고, 예매한 표 시간을 못맞추면 역에서 표 구하기가 힘들거다...
쌓인 눈이 없을 때 30분 정도 걸리는 내리막길인데, 거의 그 시간에 평지까지 내려왔습니다만.. 이제 열차 시간까지는
2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앞뒤 가릴 여유도 없이 택시를 집어타고... 원동톨게이트를 나가서 도시고속도로로
올라가서 부산역으로 가자고 주문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심각함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거죠. 도시고속도로로 올라가보니..
차가 한대도 없었습니다. 1km쯤 엉금엉금 기어가다보니 앞에 차들이 줄줄이 서있는게 보이더군요.
게다가.. 폭설이라고는 해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지 1시간 남짓밖에 안되었으니 아직 엄청 많이 쌓이진 않았는데도,
이 아자씨 다죽어가는 얼굴을 해가지고 굼뱅이 주행을 하는 겁니다. 서울에서라면 어느 정도는 속도를 낼 만한 정도인데,
비탈도 아닌 평지에서 차가 약간 밀린다는 느낌만 들어도 어어~? 어! 어!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러대니 정말 아가미 갑갑...
기사 아저씨가 눈길을 운전해본 경험이 몇번 없을 게 당연하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제가 대신 운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나더군요.
아자씨 비명소리 듣는 와중에 이미 예매한 열차 시간인 10시는 지나가버렸습니다. 철도청에 전화해보니(전화연결에도 한참
걸리두만요) 이미 끊은 표 일부라도 환불을 받으려면 열차 도착시간 이전에 역에 가서 환불 요청을 해야 한다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공포에 떠는 아자씨 차를 타고 있는 것 자체가 더 큰 위험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금이라도 빨리 도시고속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는...
그래서 첫번째 램프로 빠져나온 것이 대연동... 도시고속에 올라가면서부터 빠져나오기까지 한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눈이 없으면 7~8분밖에 안걸리는 거리랍니다. 헐~
택시를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그다음은 큰 무리 없이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또 문제...
부산역에서 표를 끊으려니 11시 40분... 그날 내내 좌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자유석이란 것만 남아 있답니다.
그런 걸 첨 들어봐서 그게 머예요? 그랬더니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인 거랍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입석인데 좌석 몇개
가지고 알아서 먼저 차지하라는 거죠.
우아~ 표 끊자 마자 아들넘 안고 집사람 끌고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세시간 내내 아들넘을 안고 서서 올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잖습니까. 자유석 지정칸은 플랫폼에서도 가장 먼, 열차의 맨 끝에 있더군요. 눈보라치는 플랫폼을 마구 뛰었습니다.
몇번 미끄러질뻔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마구 뛰었습니다. 그렇게 뛰어서 결국 좌석을 잡았지요. 오전내내 그 쌩쑈를 하고
나니, 좌석에 앉자 마자 안도감에 피로가 마구 몰려와서인지 저희 가족 셋 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골아떨어져버렸죠.
여기까지가 이번 제 부산 귀향기였습니다. 폭설로 고생해본 적도 몇번 있습니다만 열차를 예매까지 해놓고 부산에서 폭설로
열차를 놓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해서 더 황당했습니다. 지난 추석때 20시간 운전한 얘기도 여기에 썼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된게 전 결혼한 이후로는 부산 한번 다녀올 때마다 무탈하게 다녀온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작년 설에는 차끌고 갔다가 내려가는 길에 그야말로 폭설이 내려서 14시간동안 워셔액도 없이 앞도 제대로 못보고 빙판길을
운전했었고, 작년 여름에 장인어른내외분을 모시고 부산 내려갔을 때는 돌아올 때 바로 앞차가 전혀 안보일 정도로 폭우가
내려서 아예 몇시간 동안을 인터체인지 고가 밑에 차를 세워놓기도 했고...
이제 곧 또 설인데.. KTX 표를 예매해놓기는 했습니다만 또 어떤 생고생을 할지 몰라서 이번에는 도무지 집사람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 안나네요. 집사람과 아들은 두고 저만 갈 생각인데, 혹 부산 가실 분 중 표를 못구하신 분은 제게 말씀하세요.
며칠동안은 가지고 있다가 환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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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 부산 내려가실땐 일기예보를 꼭 확인 하시고 가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