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이라고 했던가?
적당한 선을 지키고 서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이 서있다보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다고 했다.
적당한 선을 지킨다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해야함을 암시한다.
결국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기대어 비켜서야 편안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일시적인 편안함이
자신을 얼마나 옭아멜 것인 지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자신을 잃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쉽게 저버리게 된다.
조그마한 성과로 인해 마음은 쉽게 들뜨고, 자만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인 본능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흐름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자연적인 흐름을 따른 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도
용기를 채우는 열정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도
당당한 걸음을 내딛을 줄 아는 신념도
모두 바른 길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에 있지 않다.
"사부님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경지에 이르를 수 있는 것입니까?"
"사방이 더우면 자신을 뜨겁게도 하고, 세상이 추위에 물들면 자신을 차갑게 하라."
"그렇다면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까?"
"뜨겁고 차가운 것은 비교할 대상이 있었을 때 생기는 번뇌이니라."
나의 스승이 말을 이어 간다.
"중용이란, 끊임 없이 한 점을 향해 흔들리는 마음이다."
* 오늘도 출근 길에 쓸데없는 상상 중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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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중용은 유가의 대표적인 경전인데,
중용은 불가의 공과 도가의 허와 더불어 우주에 대한 인간의 깨닮음의 정수입니다.
저는 중용의 진정한 가르침을
인간삶의 윤리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데서 찾습니다.
중도란 자연이 가진 절대와 상대 세계의 경계이며 질서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용자체가 인간 삶을 모두 포괄하는 각론은 아니나,
중용의 도 자체는 인간 삶을 전반적으로 포괄할수 있는
지표로서 가치가 크기 때문에, 영원히 인간 삶의 소중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완전히 깨달았다는 성인이란 바로 중용의 도를 기본 자질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중생들은 그것을 배울려고 하죠.
문득 생각나 저도 한줄 적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