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나쁩니다.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의 어린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비오는 날 우산 들고 나갔다가 잃어버린 것은 아마 다 합치면 한 오십개쯤 될 거 같고, 그 외에도 소소한 잃어버린 것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중요한 약속을 해놓고 잊어버리고 며칠씩이나 지나서야 생각이 났던 경험도 많고요. (아마 아주 잊어버린 것도 있을 듯)
의학적으로 건망증이라는 게 확정적인 병이라면 저는 좀 심각한 선천성 질환자라고 판정받을 겁니다. 물론 이런 저 자신에게 익숙해지고 스스로 대책을 여러모로 궁리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아주 크게 문제가 되었던 일은 거의 없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좋지 않은 만큼, 머리가 희어질 정도로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단 치매에 걸리고 심각해질 가능성은 좀 더 높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이 좀 많이 됩니다. 뭐 예순이 훨 넘으신 저희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많이 체력이 약해지신 지금도 아직 치매 비슷하지도 않으시지만, 그분들은 저같은 건망증도 없었으니까요. (두분은 제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제 건망증을, 알고는 계시지만 이해는 못하십니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던 초기에 그렇게 공들여 작성했던 수십만줄의 소스코드는 이미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진에 남지 않은 중학교 이하 동기 친구들의 얼굴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지금의 와이프 이전에 제가 좋아했던 여자들 얼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또 앞으로도 배우는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어가고 또 새로 만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잊어가겠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싶은 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결혼하기전 우리 아가씨와 자주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왜?' 하는 듯이 절 쳐다보던 우리 아가씨의 크고 맹랑한 눈. 더 이상 제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집에 돌아갈 때, 벨을 누르면 놀던 장난감을 팽개치고 달려나오는 '아빠~!' 하고 아들내미의 밝은 목소리. 하루의(혹은 며칠간의) 피로가 다 말끔히 사라집니다. 보너스로 다시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힘도 줍니다.
제가 너무나 약한 인간이었던 것... 그래서 자의식을 찾기까지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던 기억. 제게 겸손함이 필요할 때 그건 주로 이 기억에서 나옵니다. 또 많은 경우 자신감은 겸손함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깨달은 제 생각과 스타일...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워가는 것이라는 것.
목표라는 것은 꼭 이루어지지 않아도 즐기면서 노력할 수 있다는 것.
영원히 커질 욕심의 그릇을 채우려고 재촉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이런 것들만은 기억하고 싶습니다. 이 기억들이 저를 저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많은 것에 집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겐 이 정도만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언젠가 좌절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이것들 중 하나쯤을 잊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다시 찾아볼 생각만이라도 떠올린다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찾아 다시 제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겠지요.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 같습니다. ^^
씰데 없는 소리였습니다. ㅎㅎㅎ
당장 보고싶은 와이프와 아들내미는 집에서 쌕쌕 잘 자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네요.
빨랑 일 마무리하고 날이 밝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아들내미랑 놀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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