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ews24에 실린 기사입니다. 정말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SW를 팔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아직도 유형물 '박스'가 필요하다는.. 서글픈 내용이네요.
http://www.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6822
‘박스’에 갇힌 SW의 애환
김상범기자 ssanba@inews24.com
2002년 10 월 31일
웹 가속기 솔루션을 개발, 잉크토미나 부스트웹 등 외국 유명업체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조그만 벤처기업 다윈넷. 이 회사 이상민 사장은 회한과 미소가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검은 장비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아주 대단한 겁니다. 우리가 개발한 웹 가속기 솔루션 ‘캡CDS’ 있죠. 그게 여기에 그대로 담겨 있는 거죠. 이제 웹서버에 캡CDS를 포팅하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없어요. 그냥 선 하나만 푹 꽂으면 됩니다. 그럼 웹 전송속도가 10배나 빨라지는 거죠.”
새로 개발했다는 웹 가속기 장비를 앞에놓고 한참을 자랑하던 이 사장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이제 장사하기도 훨씬 쉬어졌어요. 웹 가속기가 어쩌구 저쩌구 얘기해봐야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든요. 근데 이거 하나 꺼내놓고 ‘이게 웹 가속기라는 장비입니다’하면 ‘아! 그래요’하고 둘러보면서 관심을 보이거든요.”
흐뭇한 미소속에 숨겨진 회한의 정체는 ‘지긋지긋했던 소프트웨어 장삿꾼의 진절머리나는 과거의 회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눈에 보여야 믿는다
이 사장도 남들처럼 중국시장 진출에 관심이 많다. 틈날때마다 중국을 드나든지 벌써 1년째. 현지 파트너를 물색하다 어찌 어찌 소개로 한 업체를 알게됐고 이른바 ‘꽌시’를 만들어 보겠다고 갈때마다 ‘얼굴도장 찍기’에 바빴다.
“갈때마다 조그만 선물하나 꼭 들고 갔어요. 하다못해 사장 부인 화장품 하나라도 들고 갔지요.”
이 사장은 얼마전 이 회사와 드디어 파트너 계약을 맺었다. 1년간 공들인 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였지만, 이면에는 ‘박스’의 힘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아무리 소프트웨어에 대해 설명을 해도 ‘일단 살펴봅시다. 몇 개 두고가요’ 하던 상대가 시꺼먼 장비 하나 꺼내놨더니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더군요. ‘아, 이게 그겁니까’ 하는 분위기였죠.”
씁슬한 미소를 띄며 이 사장은 덧붙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보다 당장 눈앞에 박스 하나를 보여줘야 관심을 보이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만국 공통의 인식인 것 같아요. 정말 소프트웨어 장사하기 힘들어요.”
직원 10명의 조그만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이 하드웨어 장비에 손을 댄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지만, 영업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 사장이 단순히 소프트웨어에 껍데기만 씌운 것은 아니다. 장비화 함으로써 설치가 쉽고 유지보수도 간단해지는 이점이 있다. 웹 콘텐츠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필수적인 네트워크 장비 하나가 등장한 셈이다. 일종의 아이디어 상품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눈에 보여야 안심하고 믿어주는 고객들의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마인드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장비 꺼내놓고 이거 5천만원입니다, 하면 ‘그래요’ 합니다. 그런데 제품설명서를 보여주며 이 소프트웨어 3천만원입니다, 하면 ‘뭔데 그렇게 비싸요’ 하거든요. 사실 내용은 같은 것인데 말이죠.”
소프트웨어를 팔기 위해선 하드웨어 장비를 반드시 겸해야 하는게 업계의 현실이다. 1억원짜리 서버를 팔면서 소프트웨어는 그냥 덤으로 준다고 한다. 물론 1억원짜리 서버에는 사실 소프트웨어 값이 보태져 있다. 서버 5천만원, 소프트웨어 5천만원 하면 소프트웨어 값을 깍으려 하기때문에 아예 서버를 1억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도는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소프트웨어 업계의 속앓이는 변하지 않고 있다. 다윈넷 이 사장이 웹 가속기 장비를 선 보인 것은 이러한 업계의 현실이 여전하다는 반증인 셈이다.
◆ "그냥 껍데기에요"
지난 7월15일 한글과컴퓨터의 ‘넷한글’ 발표회장.
워드프로세서 ‘한글’의 인터넷 버전이라 할 넷한글은 한글을 PC에 설치할 필요없이 그저 인터넷에 접속해 회원으로 가입한 후 사용하면 되는 제품이다. 제품이라기보다 서비스인 셈이다.
소프트웨어의 패키지를 없앰으로써 제품이 아닌 서비스로서 소프트웨어를 구현했다는 의미를 강조한 한컴은 그러면서 포장된 ‘박스’ 하나를 보여줬다. 겉면에는 ‘넷한글’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박스였다.
‘서비스를 박스에 담는’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것일까. 하지만 그 박스안에는 넷한글 서비스 이용권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냥 껍데기에요. 영업팀에서 박스를 만들어야 들고다니며 영업할 수 있다고, 하도 그래서 우습지만 억지춘향식으로 박스를 하나 만들었죠. 소프트웨어 업계의 씁쓸한 현실이죠.” 한컴 담당자의 설명이었다.
이른바 ‘웹서비스’의 세계 최초 구현이란 의미를 강조했던, 그래서 포장된 박스 패키지가 필요없는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발표하던 행사장은 졸지에 ‘세계 최초로 서비스를 박스에 담은’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말았다.
◆하드웨어 일체형의 속뜻
IT 업계 가운데서도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는 보안업계. 보안업계가 돌파구로 선택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일체형 솔루션이다.
올들어 보안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솔루션을 하드웨어화한 이른바 ‘일체형’ 솔루션을 앞다퉈 출시했다.
보안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전용 하드웨어 장비를 만들어 출시한 것이다. 이 일체형 솔루션은 운영체제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별도로 장착되기 때문에 속도면에서 우수해 고객들이 일체형을 원한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었다. 관리도 좀 더 쉬어진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프트웨어의 박스화를 통해 수익성 개선을 도모하려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애환이 서려있다.
소프트웨어를 박스로 만드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은 아니다.
업계 설명대로 속도나 관리측면에서 하드웨어 장비가 효과적인 솔루션일 수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업계가 장비화에 나서게 되면 그만큼 투자가 필요하고 이는 모험일 수 밖에 없다.
벤처기업이 대부분인 소프트웨어 업계 처지에서 ‘박스여야 눈길을 주는’ 시장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써 장비투자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땀과 노력의 산물이 꼭 눈에 보여야 인정해주는 사회, 소프트웨어 업계는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함께 또 하나의 힘든 벽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