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남로당육군책임자의 딸에대해 알아보자
[펌]박정희를 다시 알아봅시다.
번호:10813 글쓴이: 나라를지키자
조회:153 날짜:2004/03/29 09:00
.. 박근혜 대표체제로 한나라당이 갈아타면서 쓸데없이 박정희 향수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에 질려버렸습니다.
박정희....ㅋㅋㅋ
다음은 한때 있었으며 지금은 박근혜대표에 대해 친일 어쩌고 저쩌고하면서 연좌제적 발상으로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열린우리당조차도 찬성인지 반대인지 명확히 하지 않고 있는 "박정희 기념관"에 대해 기안했던 당시에 어느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께서 빨치산 남부군의 딸이라고 해서 그렇게도 대통령이 되는걸 반대하시고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셨던 보수 우익을 자처하시는 분들께서는 왜 남로당 육군 책임자의 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리도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근혜 대표에게 해를 끼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일정하지 않은 잣대, 춤추는 잣대로 상대방의 흠에 대해서만 과대하게 흥분하고 자신의 진영에 있는 사람의 과오는 눈감으려하는 그 잣대에 대한 항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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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사고와 근현대사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인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이 얼마나 황당한 발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을 후원하고 있는 "박사모(박정희를 사모하는 모임)"의 멤버들이 일제와 군부독재하에서 한딱까리 하던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거나 그 2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일제시대때는 일본장교로써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을 했고, 여순항쟁 때는 남로당 윤군총책으로 한때 좌익공산주의자였다가, 이승만의 군내 남로당 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숙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사형을 면제받고, 다시 한국전쟁때 육군으로 복귀한 뒤 10년 후 다시 "반공을 국시로 ..."라는 구호를 외치며 친일Technocrat과 지주세력의 지지하에 반동혁명(counter revolution)을 일으킨 반민족적 기회주이자요, 철학없이(친일->극우 -> 극좌 -> 극우 -> 독재) 권력만을 추구한 정신병자이며 본인의 야욕을 위해 민족을 희생시킨 인간말종이다.
월간조선의 조갑제 같은 박정희 찬양론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반론은 첫째로 박정희가 아니어도 오늘날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물론 군사독재하에서 처럼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가 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개발경제학자들의 의견이고 둘째로는 경제발전의 "공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무엇에 대한 대가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완용은 무조건 친일파라고 밀어 붙이고(물론 이완용은 용서할 수 없는 민족반역자이다.) 박정희는 무조건 영웅시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의도가 의심스럽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현정부가 한심하며 박정희 같은 인물이 아직도 정치적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수준이 아쉽다.
다음은 한겨레 신문에 난 컬럼이다. 한번 읽어 보길..
[가리사니] 독재자의 부활
박정희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1961년 5월16일, 그 날 대한민국 천지는 온통 공포에 휩싸였다. 총칼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이라 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공약'이라는 것을 내걸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참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혁명' 위장한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은 `용공분자 색출'을 명분으로 진보진영과 통일운동 인사 4천여명을 구속했고, 정당 15개와 사회단체 238개를 해산했으며, 신문과 잡지 1200여개를 폐간했다. 군부세력은 60년 3∼4월 민주항쟁을 통해 이룩한 민주화의 진행과 민족자주의 회복을 위한 큰 움직임 그리고 민족통일을 향한 거대한 흐름을 송두리째 가로막고 억눌렀다. 그런 점에서 5·16쿠데타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사건이었다.
박정희 군부독재 18년은 반민주적인 어둠의 역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기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그 치욕스런 고통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또 숱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그런 부당함을 호소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다 갖가지 박해를 받았다. 게다가 5·16 쿠데타는 80년 5·18 신군부에 의한 또다른 쿠데타의 길을 터주었다. 군부독재는 32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민족사의 전개를 질곡으로 이끌었다.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어쩌면 `예정된 독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 주둔 관동군 장교로 복무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박정희는 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교로 임관됐다. 48년 `여수·순천 사건' 때는 남로당 군내 조직의 한 책임자로서 `반란'이 실패한 뒤 `동지'들의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풀려난 일 등은 두루 알려진 일이다.
박정희는 63년 10월15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79년 10월26일 심복 부하의 총에 맞아 죽는 날까지 갖가지 비민주적 변칙과 철권을 휘둘러 권좌를 유지했다. 또 박정희 정권은 62년부터 경제개발을 통한 `조국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독재권력과 `유신통치'를 합리화했다. 경제개발 계획 추진만 해도 그렇다. 경제개발 계획은 쿠데타 이전 그러니까 민주당 정부가 이미 수립했던 것이고, 경제성장도 따지고 보면 노동자들과 농민 그리고 국민 일반의 피땀과 희생 위에서 이뤄진 것이지 박정희의 `영도력'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독재자의 망령을 불러들이려는가
요즈음 박정희 `미화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좀처럼 수그러질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독재자의 망령을 불러들여 자신들의 입지적 조건을 더한층 유리하게 굳히려는 비열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 부활을 거부한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었던 노동운동가들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확신한다. 지난날을 마감하고 새 천년을 맞이 하기 위한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교활한 정략이나 역사 왜곡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박정희는 그의 졸개들과 찬양자들이 말하는 대로 `혁명가'도 아니고, `영도자'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반혁명 분자'이고 보기 드문 독재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미화운동' 그 자체는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다. 박정희 망령을 불러들이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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