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가 다께끼마사오를 쏜까닭?
박정희와 김재규, 그리고 영남정서
[손석춘칼럼]핏빛 역사로부터 우리는 우엇을 배울 것인가
손석춘 기자
'결론'은 박근혜였다. 뜬금없이 "보수세력을 살리겠다"며 호들갑을 떤 숱한 윤똑똑이들이 이윽고 이른 종착점이다. 비단 언론만이 아니었다. 정치인, 문인, 학자들이 '보수'를 살리자며, '야당'이 필요하다며,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왔다.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뒤, 이제 그 목 쉰 유행가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까닭은 단 하나다. 영남지역의 여론이 '호전'되고 있어서다.
그랬다. '박근혜 체제'는 영남에서도 무너지던 한나라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이 특히 그렇다. '박정희 향수'란다. 가히 대단한 위력이다. 그의 딸이라는 까닭만으로 '제1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영남의 박정희 향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박정희 찬가를 읊어대지 않았던가. 40여 년 동안 일방적인 신문 보도를 접한 사람들에게 '고향 사람' 박정희 향수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까닭
더구나 경제성장의 신화가 그 위에 두텁게 덧칠되어왔다. 그 덧칠로 4월혁명 공간에서 이미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거나, 미국이 한국의 급속한 성장 정책을 입안했었다는 역사적 진실은 파묻혀 왔다.
그래서다. 차분할 일이다. 대구·경북이 낳은 인물이 어찌 박정희에 그치겠는가. 바로 그 박정희를 쏜 김재규 또한 영남의 아들 아니던가. 굳이 김재규를 거론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항소이유서'에서 그가 박정희를 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학생들의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 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관찰하고 판단한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하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 실장(경호실장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이승만과 달리)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
더러는 '항소 이유서'를 믿을 수 없다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부마사태를 돌아보면 김재규의 증언은 살갗에 와 닿는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지만, 만일 그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박정희는 얼마나 많은 영남인들의 가슴을 쏘았을까.
냉철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영남의 시민들을 탱크로 학살할 '임전태세'를 불태우던 그가 영남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현실은 얼마나 기막힌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부장은 최후진술에서 국민에게 당부했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자유가 병들었던 것도 우리의 노력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어지고 나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유는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았다, 20∼25년 앞당겨놓았다하는 자부, 누구의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자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만만세가 되도록 기원하고 또 10월 26일 민주회복 국민혁명이 만만세가 되도록 저는 기원합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그 여한이 한량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기약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못 보았다 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25년 앞당겨놓았다는 자부심으로 불가에 귀의한 채 세상을 뜬 김재규. 하지만 그가 '거사'를 한 지 옹근 25년을 맞은 오늘, 고향에서 불고 있는 저 '박정희 향수'를 김재규의 원혼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김재규는 옥중 수첩에서 박근혜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겼다.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만 삼)."
하여, 참담한 가슴으로 묻는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민족에게 역사는 보복한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과연 기우일까. 민주운동과 진보운동이 본디 강력했던 대구와 경북에서 불고 있는 저 '바람' 앞에, 우리 언제까지 눈 돌려야 하는가.
2004/03/29 오후 2:50
ⓒ 2004 OhmyNews
-------------------------------------------
국민의 목숨을 파리목숨보다도 못하게 여긴
다께끼 마사오.. 역시 그는 잘 되졌다..
그것도 자기의 심복에게..
|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 당시 겪은 사람뿐인데 나이가 50세 넘으셨는지요?
박정희가 대통령 그만둘려고 세번이나 안나가려했고 그때마다 국민이 말려서 할수없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이회창이나 노무현같이 집을 샀나요 부정선거자금받아 펑펑썼나요? 19년 동안 집한채 못마련했고 돈 한푼모아둔게 없는분입니다
그리고 김재규도 cia사주로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하기에 암살한거라는설이 있습니다
그당시 박대통령이 파키스탄과 플라토늄구입거래건으로 개발계획이 들통나서 암살된거
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때 핵무장했자면 지금같이 일본이나 북한이나 중국이 깔보고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우길수 있을까요? 확실치 않은얘기로 다른 사람들 헐뜯지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