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uilder  |  Delphi  |  FireMonkey  |  C/C++  |  Free Pascal  |  Firebird
볼랜드포럼 BorlandForum
 경고! 게시물 작성자의 사전 허락없는 메일주소 추출행위 절대 금지
분야별 포럼
C++빌더
델파이
파이어몽키
C/C++
프리파스칼
파이어버드
볼랜드포럼 홈
헤드라인 뉴스
IT 뉴스
공지사항
자유게시판
해피 브레이크
공동 프로젝트
구인/구직
회원 장터
건의사항
운영진 게시판
회원 메뉴
북마크
볼랜드포럼 광고 모집

자유게시판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랑방입니다.
[9011] [공개편지]<조선일보> 상종하면 어머니 두 번 죽이는 꼴
박진수 [] 764 읽음    2004-03-30 17:05
[공개편지]<조선일보> 상종하면 어머니 두 번 죽이는 꼴


[박근혜 의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육영수의 딸'과 안티조선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지환(jhjeong) 기자    



(이 글은 필자가 시민단체 공동신문 <시민의신문> 3월 29일자에 게재한 기사를 축약, 손질한 것입니다. 전체 기사 내용은 ngotimes.net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필자 주)

박근혜 의원님에게.

안녕하십니까. 먼저 한나라당 새 대표로 선출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여성 정치인이 야당 당수가 된 것은 1965년 박순천 여사가 민중당 대표를 맡은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 박 의원은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 됐습니다. 따라서 4명의 남성 경쟁자를 당당히 물리친 박 의원의 승리는 정파적 입장을 떠나 축하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이 '여풍 카드'로 '탄핵 역풍'을 과연 잠재울 수 있을 것인지가 대다수 언론사의 주 관심사인 듯합니다만, 골치 아픈 '정치 셈법'은 잠시 접어두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도리어 저는 오늘 박근혜 의원에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박근혜 의원이 이번 기회에 '안티조선'에 앞장서야 할 운명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관련 무엇보다 먼저 박 의원은 불행한 가족사를 잊어선 안 됩니다. 올해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절 행사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문세광의 총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은 너무나 많은 의혹에 싸여 있습니다. 경찰의 현장검증 과정에서 문세광이 발사한 것보다 더 많은 총탄이 발견됐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지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비명횡사한 지도 벌써 25주년이 되는군요.

육영수 여사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박근혜 의원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거니와, 박 의원의 일가족이 겪었던 불행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아버지의 술과 여자에 대한 무절제한 탐닉, 그로 인한 부모의 불화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부당한 '가정폭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박 대통령의 '술과 여자에 대한 탐닉'은 물론 박정희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의 '엽색 행각'을 옆에서 부추긴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른바 채홍사(彩虹使) 역할을 수행한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측근들이 바로 그들이었죠. 이러한 사실은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저술한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자세히 나오더군요.

조갑제 편집장은 대통령 가족의 일상을 속속들이 지켜봤던 한 청와대 부속실 근무자의 증언을 통해 그 '일그러진 풍경'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특히 1965년 전후로 박정희 대통령은 목숨 건 혁명 이후 국가발전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자신감이 충만해 있을 때였습니다. 업무가 끝난 뒤엔 마땅히 갈 데도 없는데, 측근인 이후락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 김형욱 정보부장, 장기영 경제부총리 등이 각하를 모시고 자주 요정 같은 술집엘 드나들었지요.

육 여사는 이 분들을 미워했어요. 이 분들도 육 여사를 무서워 피하고, 2층 부속실로 올 일이 있으면 까치발로 살금살금 들어와 부속실 직원에게 속삭이듯 '사모님 계시나?'하고 묻곤 했지요. 특히 이후락 비서실장은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이 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 사, 사모님 계, 계시나?'하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어요."

<월간조선>에 연재되기도 했던 이 글의 소제목은 '육박전 끝에 단신으로 마닐라행'이었습니다. 196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출국하면서 외교적 관례를 깨고 부인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 제목이었지요.

그런데 조갑제 편집장은 '육박전'의 한자를 '肉薄戰'이 아니라 '陸朴戰'이라고 썼습니다. 남편 박정희와 아내 육영수의 부부싸움을 이렇게 비유한 것인데, 조 편집장이 전하는 육박전의 양상은 대략 이러했지요.

"재치도 있고 고집도 센 육 여사는 직언보다 가능한 남편을 존중해 여러 가지 예를 들거나 돌려 말하곤 했는데, 때로는 이런 대화법이 박 대통령의 아픈 곳을 더 자극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가령, 조용한 음성으로 '혁명하신 분이 혁명정신을 잊으셨어요? 케네디나 나폴레옹을 닮으시려 하지 마시고, 여자들과 술 드시는 것보다…'라고 하면 박 대통령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소실이나 두고 첩질하는 재벌들과 어울리실 시간을 조금만 양보하시고 제 민원 하나 들어주세요.' 이런 말은 박 대통령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어 재떨이가 날아다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내에 대한 재떨이 투척, 이른바 '가정폭력'은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로부터 조갑제 편집장이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목격담에서 우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 무렵 무슨 일로 제가 청와대 2층엘 올라가게 되었는데 대통령 침실 쪽에서 육 여사의 몹시 격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긴장이 되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요.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가는데 각하께서 담배를 뻑뻑 피우시다가 별안간 재떨이를 확 집어 던졌습니다."

박 대통령의 가정폭력은 육 여사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박근혜 의원도 잘 알고 계실 문명자 여사(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과 세계여기자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원로언론인)에게 육 여사가 한숨을 쉬면서 털어놓았던 사연은 이렇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였지요. 그이가 선거운동차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저에게는 서울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참 어려운 선거였어요. 국민들에게 '이게 마지막입니다'하고 호소까지 했었잖아요. 청와대에 앉아 들으니 김대중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이라고 해요.

'저이가 그렇게 애쓰는데 나는 왜 내 남편을 못 돕나' 싶어서 바로 대통령께서 묵고 계신 유성온천으로 내려갔지요. 도착해서 대통령 계신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그이 옆에 앉아 있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도망을 쳐요. 나도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그이가 글쎄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하고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거예요."

겉으로는 마냥 행복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철저하게 골병이 들었을 육 여사의 한 여성으로서의 실존적 비극이 손에 잡히는 듯합니다. 곁에서 어린 나이에 이 모든 모습을 지켜봤을, 박근혜 의원을 비롯한 3남매의 마음 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이 마약 중독자 신세로 전락한 것은 내면의 풍요 없이 권력만 탐했던 한 독재자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방일영은 '요정정치'의 황태자?

박근혜 의원님.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비극적 종말의 씨앗을 잉태하기 시작한 시점은 조갑제 편집장의 설명처럼 1965년 전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비련의 여인' 육영수 여사가 이후락, 박종규, 김형욱, 장기영보다 더 먼저, 더 강렬하게 미워하고 증오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부활시키겠다고 나선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그 전신인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 등 부패한 구 집권여당과의 권언유착을 통해 온갖 이권과 실속을 챙겼던 조선일보 족벌사주가 방씨 일가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와 관련 몇 해 전 지병으로 사망한 방일영 전 조선일보 사장(현 방상훈 사장의 부친)의 회고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일영은 1983년 발간한 회갑기념문집 <태평로 1가>에서 1963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5·16 군사정부가 민정이양을 한다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서울에서 첫 번째 선거유세를 시작하던 그 때, 첫날이었다. 대통령 선거유세로 첫 대중 연설을 마치고 나서 그 기분으로 그 날 저녁에 흑석동(黑石洞)에 있는 나의 집으로 왔었다. 박 의장은 놀러 왔다고 하면서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민기식 참모총장과 한때 MBC 사장을 했던 황용주 씨를 대동했었다.

'처음 해본 연설이어서….' 박 의장은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저녁 7시쯤 도착하였기에 냉면을 말아서 대접하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기녀(妓女)를 몇 명 불러 왔다. 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집권자와 통행금지를 넘기면서까지 질펀하게 '기생술판'을 벌였다는 은근한 자랑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기생술판'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육영수 여사는 크게 격분했다고 합니다. 결국 육 여사는 순진한(?) 대통령 남편이 '못된 친구'인 방일영을 잘못 만나면서부터 술과 여자에 탐닉하게 됐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방일영 사장 스스로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도 "육영수 여사가 다시는 흑석동의 방일영 사장 집에 대통령이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고백함으로써 '육 여사의 격분'이 사실이었던 것만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 중요한 시기에 방일영의 저택을 찾아가 '기생파티'를 벌인 것일까요? 이와 관련 이날의 '기생술판'에 동석했던 황용주 전 MBC 사장의 증언은 시사적입니다.

그는 방일영문화재단이 1999년 발간한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에서 박 대통령이 흑석동을 찾아가 '질펀했던' 술자리를 벌인 것은 "방일영 회장이란 천하의 주도(酒徒)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황용주 씨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방일영 사장이 천하의 주도, 즉 알아주는 주당(酒黨)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방일영은 천하의 한량(閑良)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카지노 황제' 전낙원 씨조차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獻辭)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券番) 출신 기생(妓生)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겠습니까?

여기서 '기생의 머리를 얹어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미성년자 독자를 고려하여 따로 설명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일영 사장의 동생이자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인 방우영 씨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장소도 술자리였다고 합니다. 방 회장은 1998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렇게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 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날 술자리에 동석해 '끈끈한 정'을 나눈 인물들은 나중에 대한민국의 최상류층이 되거니와, 향후 그들의 인생행로와 관련해 서울신문(당시 대한매일) 1999년 10월 8일자에 '비화-3공의 실세들'(정운현 기자, 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다음의 기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들을 한국 재벌들과 정략결혼을 시켜 온 나라를 사돈관계로 얽어 놓았다. 첫째 아들은 서정귀(전 흥국상사·호남정유 사장)의 사위가 됐는데, 그는 김동조(전 외무장관) 주미대사 시절 대사 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째 아들은 한국화약 창업주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의 사위가 됐다. 그래서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 개 기업의 회장을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렀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락의 또 한 아들이 SK(당시 선경)의 창업주인 최종건(최종현의 형이자 최태원의 백부)의 넷째 사위가 됐다는 내용과 최종건 장남의 장인과 방우영이 사돈지간이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경의 최종건은 극동건설 김용산, 조선일보 방일영과 절친한 친구였고, 그 인연으로 군사정권의 최고실세였던 이후락과 사돈지간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종건과 방일영이 처음 만난 곳도 1958년 '춘추관'이라는 요정에서였습니다. 그 사연은 최종건의 일생을 정리한 <재벌24시-최종건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수원지역의 별 볼일 없던 직물회사인 선경이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도, 최종현 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일보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던 이유도 모두 박정희 시절 맺어놓았던 '술자리 인연'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래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대통령 형님'과 '밤의 대통령'

박근혜 의원님.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이후락 비서실장, 조선일보의 방일영-방우영 형제, SK그룹의 최종건-최종현 형제의 특수관계(?)와 관련, 현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소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 씨(원사주 방응모의 장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방일영·방우영 형제는 해방 이후 역대 정권과 밀착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권세를 누려왔다. 특히 1960∼70년대에 이후락을 매개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의 뜨거운 친분관계는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닌가. 요정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입 친구'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방재선 씨는 "방일영 씨가 박정희를 비롯한 역대 권력자와 술자리에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에는 방일영 사장이 자랑삼아 털어놓은 무용담(?)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습니다.

"호텔 방에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방일영은 박정희와 독대로 마주앉았다. 대통령의 체통상 요릿집에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작이 시작되자마자 방안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온 것이다."

당시 복도를 지키던 경호원들은 아연 긴장한 채 청각과 시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왜냐하면 방안에서 다음과 같은 '불경스런 대화'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처음에 '대통령 각하'로 시작한 호칭은 어느새 '대통령 형님'으로 바뀌어 있었고, 젓가락 장단에 실린 노래 소리가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뒤섞여 방문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 눌려 경호원들도 감히 문을 열고 그 안의 정황을 살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대통령의 오전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현재는 고인이 된 방일영 씨를 정계와 언론계에선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릅니다. '언론권력'으로 성장한 조선일보를 상징하는 표현이 된 이 말은 1992년 11월 당시 조선일보 회장이었던 방일영의 고희연에서 사원 대표인 신동호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의 아부성 발언에서 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을 제일 먼저 만들어낸 사람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정치의 무대는 주로 요정이었습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요정에는 항상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로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쥔 후 '요정정치'에 데뷔해 보니 항상 뛰어난 화술과 주량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방일영이었던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보기에 최고 권력자인 자기에 대한 요정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하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싫어했을까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경상도 문둥이 촌놈' 박정희보다 '서울 깍쟁이 한량' 방일영이 한참 위였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술자리에서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바로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었다고 합니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에도 자세히 나와 있는 이 비사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주야(晝夜)로 이끌었던 권력자들의 추한 알몸을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됩니다. 술과 여자를 매개로 진행된 '요정정치'를 통해 그들은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거래한 대가로 권력과 이권을 나눠먹었고, 부정부패와 협잡놀음을 통해 대한민국을 부패공화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남편과 친구들(?)이 벌이는 부패와 위선을 목격하고 청와대 내에서 외롭게 비판하던 육영수 여사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마침내 의문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육 여사의 죽음이 벼랑 끝에 선 박정희 정권의 생명을 5년이나 연장하는 데 악용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문으로 위장한 범죄집단'과 손 끊어야

박근혜 의원님.

그렇습니다. 박 의원이 지금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나라당 간판을 떼어 들고 천막당사로 걸어가는 장면을 연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구태의연한 '이미지 조작 정치'는 아닐 터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위선의 가면이 낱낱이 벗겨지고 있는 '박정희 향수'에 기대어 알량한 정치생명을 연장해 보려는 수구파의 '얼굴마담'을 자처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닐 터입니다.

그렇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을 부패와 기득권 정당이라는 나락에서 건져내겠다는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먼저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해로운' 조선일보와 인연을 끊는 일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나마 그것만이 분노한 민심을 조금이나마 되돌릴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몸부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오욕과 굴종으로 몰아넣고, 아버지를 감언이설로 타락과 부패로 이끌었으며, 어머니를 분노와 한탄 속에서 죽어가게 만든 조선일보와 완전히 손을 끊고 상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박근혜 의원이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하고, 사찰을 찾아 백팔배를 드리는 '속보이는 정치쇼'보다 더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 "구국의 영단"(12월 28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했던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닙니다(언론사 사전검열을 '구국의 영단'이라고 찬양한 조선일보가 족벌사주의 탈세 행위를 허락해 달라며 '언론자유' 운운한 것은 세기적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지요).

일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칙과 기준, 소신과 철학보다 오직 자기 중심적 유·불리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세에 편승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철저하게 관철해 왔던 조선일보는 '신문으로 위장한 범죄집단'에 불과합니다(그 증거를 알려 달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한나라당 컨테이너 당사 앞으로 달려가 '길거리 무료 특강'을 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박근혜 의원님.

조선일보와 손을 끊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두려운 일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박근혜 의원에게 "12척의 배만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면서 이 자리에 섰다"던 취임사 연설 때의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만 있다면, 대한민국을 더 이상 '한국의 르펜과 매카시'인 조선일보의 농락에 맡겨놓지 않겠다는 지도자의 도덕성과 통찰력만 지니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를 반공과 친미라는 저열한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킨 '수구·기득권 세력 그 자체이자 대변자'인 조선일보를 청산하겠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역사적 사명감만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박 의원 자신이 '육영수의 딸'이라는 실존적 자각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박근혜 의원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 의원이 한나라당 간판 떼어 메고 '천막당사'로 가던 날

정지환 올림. 

+ -

관련 글 리스트
9011 [공개편지]<조선일보> 상종하면 어머니 두 번 죽이는 꼴 박진수 764 2004/03/30
Google
Copyright © 1999-2015, borlandforum.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