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할 수 있는 승리는 아니었지요.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는 낙승을 예고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툭툭 떨어져났고 한나라당의 의석수는 슬금슬금 증가했습니다. 어젯밤 자정 직후에, 잠깐이나마 의석수가
과반 미만으로 떨어졌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죠.
또한 그동안의 한나라당의 미친 정치행태를 보고도 그만큼 많은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져주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등장을 축하하지만, 그만큼 국민들이 성숙해졌다고 말하기에는 시대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표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열린우리당이 승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너무나 처절한 승리였습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탄핵직후부터 얼마동안 열린우리당이 쏟아져 들어온 지지 여론에 심취하여
안주해버렸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유가 어쨌든 치명적인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안이함보다 더욱 더 안타깝고 피를 토하게 하는 것은, 박근혜의 얼굴 하나로 돌아서버린
민심의 흐름이었습니다. 언론은 절대로 국민들을 직접 질타하지는 않지요. 국민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자성해야 하는 것은 국민들 자신입니다.
지금도 저는 열린우리당의 승리라기보다는 국정의 승리를 걱정합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발목잡혀온 국정의
흐름은 이제부터는 소신있게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욕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열린우리당 스스로도 한나라당 민주당의 딴지를 핑계삼지 않을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임있게 욕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지금부터가 열린우리당 내부의 진정한 자성의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되는가 안되는가에 집착하느냐고 물으실 분들도 있겠지요. 아래에도 썼지만, 저는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지켜본 민주노동당은, 표를 가져가는
데는 전략적이었고 협력에는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과반이 되지 않고는 제대로 국정을 이끌 수가
없을 거라고 본 겁니다.
또한 젊은 층의 투표율에 대해서도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젊은 층의 투표율이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평소에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좀 더 동원된 정도이지 관심이 없었던 젊은이들을 일깨우지는
전혀 못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견된 승리를 너무도 어렵게, 그것도 가까스로 얻었습니다.
그나마 얻은 소득이라면,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지역 편파성, 그리고 기득권 편파성이 극명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영남권 싹쓸이, 강남권/분당 싹쓸이를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들 지역의 유권자들도
그런 한나라당의 극단적 편파성과 자신들의 편향된 정치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자성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박근혜대표가 그렇게 주장한 것처럼 내부 혁신을 통해 합리적인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차례 그랬던 것처럼, 내부 혁신의 시도들이 어영부영
끝난다면 그것은 다시 한번 국민들을 속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정치 발전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개혁을 열망한 국민들은 승리를 외쳤지만, 사실은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총선이 끝나고 열린우리당이 과반 승리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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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의장도 그런 표현을 했더군요.
탄핵사건부터 총선에 이르는 한편의 영화같은 드라마의 연출은 하늘이 개입하지 않고 이루어지기 힘든 일입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논리를 기반으로하는 프로그래밍적인 사고요소와 상당한 개념의 차이가 있는 철학적인 표현이라고 보통 느끼지만, 사실은 흡사한 것입니다. 하늘이 계획을 짜는 것은 플머가 프로그램을 짜는 것과 비슷하죠. 우주의 모든 요소는 먼저 계획의 법이 나오고, 이를 신이 주관하여 세상에 구체적인 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한마디의 말이 서양철학사의 최고의 철인인 화이트헤드 철학의 핵심과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