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같은 감옥에 가족을 두고 울부짖는 이라크인들… 현장르포로 밝히는 미군들의 무차별 연행과 구금
바그다드 · 나자프 · 팔루자= 글 · 사진 강은지/ <민족21> 기자
어쩌면 최근 공개된 미군과 영국군의 이라크 죄수 학대 사건에 분노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이라크인들이 생각보다 조용한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1년 넘게 미군 주도 연합군의 ‘이라크 점령’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온 이라크인들이 어째서 이 끔찍한 사건이 공개됐는데도 반란을 일으키지도, 거리로 쏟아져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지도, 총을 들고 미군을 향해 돌진하지도 않는지 말이다.
포로 학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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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디자인/ 권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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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보낸 몇주, 매일같이 ‘점령군’이 벌이는 인권유린과 만행을 지켜보고 이라크인들의 분노와 절망, 한숨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자는 지금 이라크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새삼스럽게 분노할 것도 없다”라는 것.
사실상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유린 행위는 아부 그라이브를 비롯한 감옥 내의 죄수 학대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이야기로만 전해듣던, 소문으로만 듣던 일들이 눈앞에 증거로 드러나면서 감옥에 사랑하는 이를 둔 이라크인들의 심정은 더더욱 무너질 듯 애타겠지만 이들에게 오늘 더욱 큰 문제는 감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부당한 무차별 구금과 총격이며 가족의 행방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들이다.
특히 아부 그라이브 감옥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부터 정치범을 수용하던 곳으로 미군 역시 저항세력 같은 일종의 정치범을 이곳에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수감자 1만5천여명(이라크 인권부 주장)이 이곳으로 끌려오게 된 사연 자체가 대부분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후세인은 민심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마다 부족마다 ‘셰이크’를 지명해 중간 통치를 맡겼다. 이라크 사회에서 셰이크의 위치는 특별하다. 셰이크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인 의미도 지닌 존재였다. 미군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이래로 셰이크들을 특히 많이 살해하고 감금하고 탄압하는 것도 셰이크들의 이러한 사회적 지위 때문이다. 비록 후세인이 임의로 임명한 경우가 많더라도 셰이크는 이라크 사회에서 여전히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들이다. 따라서 셰이크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 5월5일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 높은 담장과 철조망 밖에서 가족들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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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아부 야신 알자위 셰이크도 금요기도회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미군에게 끌려갔던 이들 중 하나다. 그는 이스라엘이 아메드 야신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자를 암살한 직후 열린 금요기도회에서 이를 ‘국가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날 오후 5시 미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끌고 모스크에 들어왔다.
“전 지역을 탱크와 장갑차로 포위하고는 모스크에 들어와서 ‘당신과 당신 아들은 금요기도에서 연합군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며 우리를 잡아갔습니다. 우리는 아부 그라이브로 끌려갔어요. 미군은 침대도 담요도 없는 아주 작은 감방에 우리를 가뒀어요. 미군은 내가 기도를 하기 위해 목욕을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고 얼굴에 두건을 씌웠어요.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화장실에 한번 가려고 해도 아주 복잡했어요. 내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병사들은 나에게 총을 겨눈 채 앞에서 지켜봤어요.”
그래도 12일 뒤에 풀려난 알자위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였다. 사마라 출신의 셰이크 아메드 야히르 알사마라이는 현재 형과 두 아들을 아부 그라이브에 보내놓고 있다. 아메드보다 더 지위가 높은 셰이크였던 형은 지난해에 아부 그라이브로 끌려갔고 바그다드에서 자동차 부품상을 하던 아메드의 두 아들은 몇달 전 가게를 기습한 미군에게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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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사드르 시티의 한 민가에 로켓탄이 떨어져 방에서 잠자고 있던 여성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진 그의 피와 살이 대문간에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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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갑자기 가게에 들이닥쳐서는 아들 둘을 다 끌고 갔어요. 가게에 있던 돈과 차 두대를 가져가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어요. 아들들 면회는 지금까지 한번도 못했어요. 아부 그라이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 감옥의 상황을 듣기는 했어요. 천막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둔다든가,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과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심지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서 있게 하는 고문을 한다고 들었어요.”
공포스런 미군의 무차별 사격
끌려간 두 아들의 자식인 다섯명의 손자를 거둬 기르고 있는 아메드의 부인 움 오마르는 “사담 후세인도 죄수들을 미군만큼 그렇게 가혹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며 강력하게 비판하다가 미군에게 죽임을 당한 셋째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아들 중 두명은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오다가 미군의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 미군은 그들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한 다음, 차를 탱크로 갈아버렸다. 그러고는 몇 시간 동안 아이들을 붙잡아놓았다가 사마라 인근의 티그리스 강변으로 데려갔다.
“미군들은 그들보고 티그리스 강물로 뛰어들라고 했어요. 그곳은 물살이 아주 세요. 나뭇조각을 던지면 금세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그런 곳이에요. 한명은 살아났지만 다른 한명은 14일 뒤에 주검으로 발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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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루자에 미군 폭격으로 불타버린 자동차가 길거리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거리에 움직이는 모든 것은 쏘아버리는 미군 저격수가 두려워 이들은 자동차 안에서 죽은 이들의 주검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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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아메드 야히르 셰이크와 가족에게 차량 파손에 대해 6천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한 아들의 죽음과 두 아들의 구속에 대해서는 지금껏 단 한마디의 해명도 사과도 없었다.
미군은 무크타다 알사드르 ‘추종자’들에게만 총을 겨누는 것은 아니다. 미군 탱크가 지뢰나 폭탄 테러 공격을 받으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사방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는 일은 다반사고 특별한 이유 없이 사방에 총질을 가하는 경우도 심심찮다. 나자프 할리에서 미군에 강제 연행된 이라크인 애드난 탈리브 오니비를 찾기 위해 신청서를 내고 바그다드 미 임시행정처(CPA)에서 돌아오던 길, 갑자기 비는 내리는데 택시를 잡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기자를 호텔까지 태워다주었던 자바 사야 무소위는 지난 4월4일 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16살난 큰아들을 잃었다. 그날, 알사드르 시티에서 벌어진 미군 탱크의 무차별 사격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은 그의 아들 자말을 포함해 무려 8명에 달했다.
“오후 7시30분쯤이었어요. 자말에게 집 근처 주차장에서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갑자기 도로에 미군이 나타난 거예요. 아들이 걱정돼 나가려는데 갑자기 미군이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어요. 겁이 나서 숨었다가 미군이 지나간 뒤에 밖으로 나갔더니 주위 사람들이 “아들이 차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옮겼지만 죽었다”고 하더군요.”

△ 셋째아들이 미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형과 두 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셰이크 아메드 야히르 알사마라이는 현재 다섯명의 손자를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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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말이 미군의 무차별 사격을 피해 숨었던 차에는 무려 73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한번에 8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날 저녁, 도대체 미군은 왜 이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일까.
부시 행정부가 지명한 인권부(The Ministry of Human Rights)의 수석변호사 사드 술탄 후세인도 무차별 구금과 사격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재 이라크인들이 고통받는 가장 큰 문제는 미군의 무차별 구금입니다. 그들은 그냥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왜 잡혀갔는지 모르지요. 가족의 면회도 안 되고요. 가족 면회를 규정한 제네바 협약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억울한 사연 하나 더. 후세인 살렘 클레프의 맏아들은 지난해 4월6일 미군에 잡혀갔다. 그때 그들은 미니버스를 타고 바그다드를 빠져나가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차별 구금”
“미군이 갑자기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아들이 차 꼭대기에 올라가 평화의 상징으로 백색기를 흔들었는데도 그들은 총을 쏴서 다리를 다쳤어요. 미군이 우리를 세우고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차에 올라탔어요. 아들이 다친 것을 보자 그들은 의료진을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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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서 미군의 총격으로 아들을 잃은 팔루자의 한 어머니. 그는 차마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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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뒤, 미군 의료 헬리콥터가 오더니 아들을 데려갔다. 그 이후 그는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들을 바그다드로 데려간다고, 아들의 상처가 치료되면 부상당한 곳으로 다시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미군기지를 다 뒤졌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어요.”
아들이 사라진 지 1년, 후세인 살렘 클레프는 공식적인 방법을 모두 포기했다. 그는 바그다드 전역에 아들을 찾는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다. <알자지라> 텔레비전에 방송도 요청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5월2일 무크타다 알사드르의 알메흐디군과 미군의 싸움을 취재하기 위해 나자프로 향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애드난 탈리브 오니비의 사연은 미군의 인권유린 행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월1일, 미군 15명이 나자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힐라의 바빌론 인권단체연합(Human Rights Association in Babylon)에 침입했다. 그리고 미군의 점령에 어떻게 하면 평화적인 수단으로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던 이들을 습격해 두명의 세이크를 살해하고 힐라의 알사드르 사무실 대표 애드난 탈리브 오니비와 다른 한명을 잡아갔다.
“우리는 펜과 종이만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총을 들고 쳐들어왔어요. 인권단체에 습격해서 사람을 죽이는 미국이 어떻게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권을 말할 수 있나요?”
“수감자 석방 무작정 기다려라”
그 자리에 함께 있다가 미군에 의해 머리와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하젬 알사피는 폴 울포위츠가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힐라의 이 인권단체 연합을 찾아왔다면서, 자신은 그때 그와 악수를 나누고 친구라고 생각했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인권단체인 우리는 매주 20여건의 구금 사례 신고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다 이제는 우리 사무실에서 사람이 죽고 잡혀가다니, 우리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미국이 적을 한명 죽이거나 구금하면 그만큼 새로운 적들이 더 많이 만들어질 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미국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 25일 동안 팔루자를 지켰던 무자헤딘들이 거리에 이라크 국기를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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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5월3일 미군의 바그다드 임시행정처를 찾아가 애드난 탈리브 오니비의 행방을 찾는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라크 지원센터’(Iraqi Assistance Center)에서 연합군에 의한 이라크 구금자들의 명단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없었던 일이다. 붙잡혀간 가족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는 온 사방을 뒤지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뒤지고 다닌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지, 언제 나올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른 채 몇날 며칠, 몇 개월을 마음 졸이며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청서를 제출한 지 10일이 지난 5월10일까지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에 가면 언제나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어 속이 타던 사람들은 언론이 접근하면 바로 달려와서 앞다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5월5일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에서 만난 사마라에서 온 타리크씨는 친척 중 10명이 감옥에 갇혀 있다. 그 중에는 73살의 아버지와 친형도 있다. 그는 지난 1월 미군에 잡혀간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면서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는 아버지가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전 간신히 아버지를 면회했는데, 많이 편찮아 보이셨어요.”

△ 팔루자의 공동묘지. 이 청년은 누구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하는 것일까.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팔루자 주민들이 한 일은 죽은 이를 위한 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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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린은커녕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담요 한장과 하루 담배 세 개비가 전부라고 한다. 계절에 맞는 죄수복조차도 주지 않아 겨울에 잡혀간 사람은 겨울옷 그대로이고, 지난해 여름에 잡혀간 사람은 1년 가까이 옷 한벌로 지낸 탓에 다 낡아 해진 상태라고 했다.
바그다드 북쪽 알들로위아(Al-Dlouwia)에서 온 한 남자도 통행금지령을 몰라 길을 걷다가 잡혀간 조카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면서 “음식도 적게 나오고 잠도 제대로 자게 해주지 않아서 아주 쇠약해져 있었어요. 게다가 정보를 알아낸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일삼고 죄수들에게 항상 겁을 주고 많은 고통을 준다고 해요. 하지만 잘못한 게 없는데, 아무리 고문을 한다고 해서 얻어낼 게 있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벌어진 죄수 학대 사건은 이라크인들이 미군 주도의 점령하에서 겪어야 하는 아픔과 고통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하루 하루,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내 가족이 죽임을 당할지, 행방도 알 수 없는 채 그냥 사라져버릴지 조마조마해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라크인들. “이라크에 테러리스트란 없어요. 내 나라, 내 가족, 내 땅을 지키겠다는데, 그게 어떻게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나요? 무엇보다도 당신들은 도대체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거예요.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이고 자유인가요?”라는 그들의 외침은 그래서 너무도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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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도시, 불안한 활기… 600~1000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은 팔루자의 악몽과 분노5월7일 금요일. 다시 찾은 팔루자는 조용했다. 바그다드에서 팔루자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도 이라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미군 체크포인트 하나가 들어가는 차량을 검사할 뿐이었다. 지난 4월29일, 기자가 두 번째로 팔루자 진입을 시도했을 때 “다시 한번 제멋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쫓아내겠다”고 협박을 해댔던 미군 병사가 기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웃으며 농담을 걸어댔다.
“오늘 축포 소리(이라크에서는 결혼식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공중에 공포탄을 많이 쏜다)가 몇번 난 것만 빼고는 요 며칠 동안 팔루자는 아주 조용합니다. 그렇다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지난 5월1일 처음 팔루자에 들어갔을 때, 팔루자는 유령의 도시를 방불케 했다. 다 무너진 집들, 텅 빈 거리, 외국인이 나타나자 유령처럼 폐허에서 하나둘씩 나오던 무자헤딘들. 그러나 그로부터 6일이 지난 5월7일, 팔루자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는 듯 보였다. 거리에 음료수며 담배를 파는 가판대들도 다시 등장했고 시장도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한 팔루자 주민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며칠 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미군 저격수들도 떠났다.
25일 동안, 거리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버리는 미군 저격수가 무서워 제대로 거두지도 못하고 길거리에, 무너진 건물 잔해에, 집 앞마당에 얕게 판 구덩이에 방치해두었던 시신들을 공동묘지에 이장하는 작업도 이제 거의 마무리됐다.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집이 파괴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을 빼면 팔루자를 빠져나갔던 난민들도 대부분 돌아와 집을 손보느라 바빴다.
28명의 가족이 골란지구의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아흐메드 하림 메크리프는 그날 막 팔루자로 돌아온 참이었다. 지난 4월6일 그가 사는 집 주변에 미군의 폭격이 쏟아졌다. 그의 집과 주변의 주택 여러 채가 미군의 로켓탄에 맞아 지붕이며 벽이며 물탱크며 모든 것이 부서졌고, 그는 가족을 이끌고 서둘러 팔루자를 떠났었다. 마을을 비우라는 미군의 명령에 도시를 빠져나가 바그다드의 친척집에 머물다 이틀 전에 돌아왔다는 압둘 사하는 그날 폭격으로 이 동네에서만 9명이 죽었다고 전했다. “그날 이곳에 무자헤딘은 없었어요. 칼리슈니코프 소총 한 자루만 들고 마을 치안을 맡고 있던 청년들 몇명이 집 근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미군이 폭격을 해서 집안에 있던 5명이 죽고 차를 타고 지나가던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어요.”
아흐메드는 미군이 팔루자 외곽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그곳에 있는 미군의 존재 자체가 팔루자에 위험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왜 시작됐나요? 미군 용병 4명의 죽음 때문 아닌가요? 미군이 지금 팔루자 외곽에 남아 있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그들 중 1명이라도 죽인다면, 그들은 다시 팔루자에 들어와 우리 모두를 죽여버릴 것 아닌가요?”
25일 동안, 팔루자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적게는 600명에서 많게는 1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분명 집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혹은 팔루자를 빠져나가려고 거리로 쏟아져나왔던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 파괴된 이들의 삶의 터전은 또 누가 복구해줄 것인가. 폭격이 멈췄다고는 하지만, 미군이 팔루자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들의 기억 속에 악몽과 분노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팔루자의 상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팔루자 취재기간에 기자와 동행했던 아흐메드 하림 메크리프는 내내 친절하게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헤어지는 자리, 입가에 그대로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은 소름끼쳤다. “당신, 2주일 전에만 들어왔어도, 내가 당신을 납치했을 겁니다. 다행인 줄 알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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