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노인의 목숨건 ‘마지막 모내기’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5/005000000200405211018001.html
△ 스토리사격장 안에서의 농사짓기를 중단하라는 내용을 담은 세 통의 국방부 공문.
파주시 파평면 우재욱씨
농토 70%가 스토리사격장으로
'모판 철거' 국방부 통첩에
'죽은 목숨' 유서쓰고 농사
“농사를 짓지 말라는…. 죽으라는 소리야.”
우재욱(82살·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노인은 목숨을 내건 싸움을 하고 있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에 있는 농토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51년 1·4후퇴 때 월남해 장파리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75년에는 민통선 안에 있는 땅을 개간해 농사를 시작했다. 개간해도 좋다는 군부의 승인을 받았다. 96년에는 ’없는 형편’에 농업진흥공사(농업기반공사의 전신)에서 돈을 빌려 3000평의 땅도 샀다. 5대 독자와 손자 녀석들을 위해서였다. 살아생전 살붙이이게 남겨줄 유일한 유산이었다. 20년 넘게 소작농으로 살아온 그에게 이 땅은 피땀 흘려 일군 노력과 삶의 터전인 셈이다.
그런데 그 땅이 없어졌다. 미군 스토리사격장의 공여지가 되면서 지난 2001년 정부에서 강제 매입했기 때문이다.
매입할 당시 평당 시가보다도 2만원 낮은 2만8천원이었다. 그가 땅을 개간해서 살 때까지 무려 30년 넘게 자식들을 키울 수 있게 해줬던 땅이었다. 그가 땅을 팔아 손에 쥔 건 8000만원이 아닌 3000만원 뿐이다. 농업진흥공사에 빚진 돈 5000만원이 땅을 팔자 한꺼번에 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무소에서도 땅을 팔았다고 양도소득세 300만원을 내라고 했다.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대학 다니는 두 명의 손자 한해 등록금 낼 정도밖에 안된다. 그나마 올해는 그 돈이라도 있어 등록금 내지만, 내년에는?.
“이제 와서 살아보겠다고 기초를 잡았는데, 이 땅을 다 매입해갔어. 팔기 싫어도 어떻게 해….”
그는 아들인 우경복(50살)씨와 함께 자신의 땅 3000평과 1만7000평을 빌려 2만평 정도 농사를 지었었다. 지금은 농사를 지었던 땅의 70%가 스토리 사격장 안에 있다. 그나마 30%도 장파리 주민들이 서로 소작을 짓겠다고 해 소작을 하기로 어렵다.
농사짓기 위해 산 농기계 1억원의 대출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집을 담보로 해 빌린 돈이다.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어 대출금 갚기도 막막하다.
그는 처음 땅을 매입할 때 “매입한 땅의 50% 정도 ‘대토(농사를 지을 수 있게 주는 땅)’를 주겠다”는 정부의 약속만 믿었다. 그런데 대토도 안 줬다. 이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라곤 없다. 여덟 식구의 입에 거미줄 치게 생겼다. 한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에게 이 ‘땅’의 의미는 여덟 식구의 삶이다.
이제 농사를 지을 땅이 없으니 자연히 스토리 사격장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가 생존을 건 농사짓기가 시작된 이유다.
“이 놈의 땅(농사를 짓는)을 미군이 막거나 국방부에서 막으면 그날이 내 제삿날이라고 정해놓고 만반의 준비를 했어. 나는 목숨 내놓고 하니까 맘대로 하라고 하셔.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자를 남긴다고 하는데, 한 번 보라 이거야. 어데란 일이 터지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내가 무슨 희망을 바래고 더 살겠다고….”
그가 땅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이유는 땅에 얽힌 ‘한’과 관련이 있다.
1926년 일제시대 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우 노인.
일제의 식량수탈로 할아버지는 많은 땅을 빼앗겼다. 이어 1946년 북한이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땅도 빼앗겼다.
△ 지난 13일 온 경고성 공문. 22일까지 철거하지 않으면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46년도 음력 2월28일 돌아가셨어. 토지개혁되니까 억울해서. 4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토지개혁 때문에….”
그는 말을 채 잊지 못했다. 담배로 손이 갔다. 그리고 담배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 또한 30년 넘게 농사를 짓던 땅을 미군에게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자 두 명이 대학에 다녀. 농사 질 땅이 없어 손자들 공부 못 시켜. 뭐로 시켜. 차라리 할아버지 구실 못할 바에…. 권력자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 법에 보장돼 있는 것도 찾지 못하는데, 앞으로 무슨 희망을 바래고 살 갔어. 살아서 무슨 필요가 있갔어.”
그는 21일 스토리 사격장 안에 있는 땅에서 모내기를 할 작정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는 내용의 유서까지 써놨다. 설령 이날 모내기를 하고 앞으로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수확을 거둬들일 수 없어도 그는 한다. 모내기를.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모내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검지 손가락을 들면서) “모가 이만큼 자랐다”고 말했다. (잠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농부다운 태도를 보였다. 기쁨도 잠시.
책상에는 국방부 시설본부에서 온 우편물이 세 통이나 놓여있다. 지난 13일에 온 우편물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파주시 진동면 초리 731번지 외 국유재산을 무단점유하여 불법영농과 함께 기 보상된 농업시설(농막 및 양수시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당 지역은 SOFA 협정 제2조에 의하여 주한미군에 공여된 재산으로서, 공여 외의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고, 2004년부터 사격장의 안전을 고려하여 울타리를 설치 중에 있으며 분묘이장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는 즉시 영농을 중지하시고 귀하의 시설을 2004년 5월22일까지 수거하여 주시길 다시 한 번 요청합니다.
국유재산법 제58조에 의하면 국유재산법을 위반하여 행정재산 또는 보전재산을 사용하거나 수익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고, 군사시설보호법 제 14조에 의하면 군사시설을 손괴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되어있으며, 동법 제 17조에 의하면 무단으로 통제보호구역이나 군사시설 안에 출입하였을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사오니 참고바랍니다.”
20일 국방부에서 또 최후 통첩이 왔다. 스토리사격장 안에 있는 모판을 철거하라는 것이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농사 짓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살라고. 대토도 안주지. 실농보상비(3년동안 농사를 지으면 나올 수익을 보상금으로 지급하는 것)도 다 받지도 않았어. 농사만 못 짓게하면 다야. 지네들이 할 것을 다해놓고 못자리를 못하게 하든지 해야지…. 50%의 대토를 준다고 해서 못자리를 해놨는데, 준게 머야. 우리 가지고 공갈 때린 거지.”
아들 우씨도 거들었다.
“땅값 받아도 애들 등록금으로 나가고 있어. 땅이 있을 때는 대출이라도 받어, 그런데 땅이 없으면 대출을 안해줘. 땅을 임대라도 받아 농사를 지으면 대출을 해주는데, 이제 그것도 안돼. 심지어 학자금 대출도 안돼. 보증을 세우래. 아무 것도 없는데 누가 보증을 세워줘.”
아들 우씨의 감정이 격해졌다.
“23일에는 울타리를 세운다고 그래. 땅값도 제대로 안주고, 생계대책도 안 해주고. 거기다 세무소에서는 양도소득세 내라고 그래. 개코도 없는데, 집도 잽혀 먹고. 농기계 사느라 1억 들었어. 트랙터 3천만원, 콤바인 4천만원…. 그게 다 빚이야. 처음에 농기계도 보상해준다고 그랬어. 다 해달라고 그랬어. 사진도 찍어갔어. 그런데 보상 안해줘. 살길을 다 막아놓고 땅도 없는데. 어떻게 농사를 안 질 수가 있어.”
우씨가 아버지와 함께 외로운 싸움을 거는 이유다.
이승경 기자 yami@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