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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36] 제 3국에 대한 미국의 정권 전복사례검토 2
박진수 [] 1371 읽음    2004-06-09 09:38
제 3국에 대한 미국의 정권 전복사례검토 2

http://www.minkwon.org/board/view.php?id=d1&no=48



박제민/한국민권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들의 결사항전으로 중대국면을 맞고 있다.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전민중적 항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쟁의 장기화는 불가피해졌고 이로 인해 부시 미 대통령은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고 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전략의 핵심 키워드였던 개혁적(반미적) 성향의 정권전복과 식민지 대리정권의 창출은 전민중적 항쟁 앞에서 파탄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 이라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번 17대 총선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승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자.
역사속에서 승리도 많았지만 패배 또한 많았음을.
미 제국주의의 침략은 언제나 정권을 전복하고 식민지 대리정권을 창출해온 역사였음을.
지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본질을.


4) 이라크(1972년~현재)


다년간에 걸친 공작 및 군사 개입으로 반미 후세인정권 전복
방식 : 군사침공, 경제봉쇄, 외교 고립등
명분 : 1970년대 쿠르드족 자치문제, 1차 걸프전 쿠웨이트 해방, 2차 걸프전 반테러전쟁
결과 : 반미 후세인 정권 축출, 친미 과도 통치위 설립(현재 진행중)

이라크 내에 친미정권을 세우기 위한 미국의 공작은 정말 집요하고 오랜 기간 계속되어 왔다. 70년대부터 무력개입, 정치공작, 외교압박, 경제제재등 거의 모든 방식이 다 동원 되었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는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에 대한 인권탄압을 구실로 수백만 발의 탄알과 총을 쿠르드족에게 지원하였으며 그 원조액은 1천 6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쿠르드 반군은 이러한 군사원조에 바탕해서 이라크 정부와 내전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음은 물론이다.
또한 당시 친미 이란정권과 이스라엘 정권을 통해 이라크를 압박하였으며 이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자국의 쿠르드 반군진압에 진땀을 빼게 함으로써 대외팽창을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러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미국은 자신의 지원으로 후세인과 싸워왔던 쿠르드 족에게 군사지원을 중단하였고 이로 인해 쿠르드족은 이후 이라크에 의해 많은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1991년에 미국은 이라크와 쿠웨이트 분란에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해 오다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약 하루) 입장을 바꾸고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감행한다.
당시 미국은 여러 차례 공식적 발언을 통해 "미국은 페르시아만의 어떠한 나라하고도 방위조약을 체결한바 없다(켈리 미국무부 근동, 남아시아 차관보)", "우리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다고 해서 우리의 군대를 파병할 의무는 없다"고 공표한바 있다.

쿠웨이트는 사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라크 영토의 일부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후 영국에 의해서 분할 건설된 나라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라크-쿠웨이트 간에는 끊임없는 영토분쟁이 지속되어 왔으며 미국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국적군의 이름아래 약 50만명의 군대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이라크의 무조건적 철수표명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학살을 감행한다. 아마도 이라크가 후세인 1인 지배의 강력한 반미국가가 된 것은 이슬람 종교적 영향도 있겠지만 이 당시 미국의 침공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차 걸프전이 휴전의 형식으로 끝을 맺은 뒤 미국은 가혹할 만큼의 경제봉쇄 조치를 이라크에게 취하여 이라크 국민의 생활은 비참할 정도로 추락하게 된다.
이 가혹한 경제봉쇄조치의 목표는 후세인대통령이 항복을 하게 만들거나 이라크 내의 반정부세력이 국민들의 불만을 모아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경제봉쇄 조치의 영향을 잠시 살펴보면
일체의 수입 및 원조가 불가능해진 가운데 이라크는 영양실조, 기아, 의약품부족, 식수오염, 사람의 배설물 퇴적, 장티푸스, 전염병처럼 퍼지는 홍역 및 기타 질병들이 계속되었다. 이라크는 식품공급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외구좌의 동결, 원유 판매금지조치로  한톨의 식량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부품을 수입할 수 없어서 공장이 문을 닫고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어 재건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피 했다.
그럼에도 1994년 9월 미정부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통삼금지의 고삐를 조였고 이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라크 국민 스스로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약 40만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다시 한번 이라크와 테러단체와의 연계, 대량살상 무기 보유등을 이유로 이라크를 대규모로 침공하였고 결국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고 친미 과도통치위원회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4) 5) 그레나다 (1983)


군사침공을 통한 혁명전권 전복
방식 : 군사침공
명분 : 그레나다 내의 미국 시민 보호
결과 :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 전복, 친미임시정부 수립


그레나다는 1973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카리브 연안에 있는 인구 10만의 소국이다.
카리브해 연안의  개발도상국들이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영향 밑에 친미화 되고 있었던 반면 그레나다는 1979년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국가를 지향하는  인민혁명정부가 집권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자메이카를 비롯한 카리브 연안국들이 미국의 이익을 구현하는데 부족함 없는 최적의 친미적 정권인 반면 그레나다 정권은 자주적 성향이 강한 정권으로 미국의 이익을 카리브 연안에서 극대화하는데 중장기적으로 큰 걸림돌로 될 것으로 판단 미국은 침공을 감행하였다.
당시 그레나다의 인민혁명정부는 노선의 대립으로 강격파와 온건파간이 유혈대립이 발생했는데 이를 명분으로 미국은 마침내 1983년 10월 25일 자메이카 등 친미적인 카리브 6개국의 요청에 따라 그레나다 정부의 내전에 <미국시민의 안전 확보, 민주주의 및 법질서 수호>를 명목으로 침공을 감행하였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은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너무나도 뻔한 침공으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찬성 11, 반대 1, 기권 3으로 "무력간섭의 즉각 중단과 외국군의 즉시 철수"의 결의를 채택하였으나 미국의 거부권 발동으로 무시되고 말았다.

침공 첫날 1200명 규모의 미군이 파병되었으나 그레나다 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몇일 동안 대규모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군사력 앞에서 인구 10만의 구레나다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미군이 7,000 명 이상으로 불어나자 이 소국의 군대는 더 이상 항전을 하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카리브의 작은 소국인 그레나다는 거대한 제국주의 미국에게 완전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

침공당일 그레나다를 점령한 미군은 강경파 지도자 오스틴과 인민혁명정부의 간부들을 체포하고 1984년 12월 총선에서 친미 과도임시정부를 건설하였으며 1985년 6월 침공 후 약 20개월 철수하였다.
미국의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 전복사례는 그 명분조차 구차하고 뻔뻔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정권 전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6) 니카라과


자주적 산디니스타 정권의 전복
방식 : 반군지원, 경제봉쇄, 여론조작
명분 : 마르크스주의 산디니스타 정권 반대
결과 : 자주적 산디니스타 정권의 전복

니카라과는 중미에 위치한 나라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고 1836년 완전 독립을 성취하게 된다.
중미에 위치한 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강대국의 식민통치와 대리정권의 독재정치로 니카라과는 오랜기간을 보내 야했다.

1934년 미군에서 훈현을 받은 국가경비대의 안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은 미군 주둔에 항거하며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암살당한 니카라과 민족해방운동의 전설적 영웅 A. 산디니스타를 암살하고 1937년 부정한 선거로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이 때부터 1979년 그의 아들인 소모사가 민중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근 반세기 동안의 <소모사 독재왕조>이어 지게 된다.
소모사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여타의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그 부정부패가 무척이나 심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으로 소모사가 마이애미로 망명했을 때 소모사 일족이 빼돌린 돈이 니카라과 전체 부채와 맞먹는다고 하니 이들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수 있다.
소모사 독재정권은 야당지도자의 암살과 탄압, 국민적 지지를 받는 언론인들에 대한 테로도 서슴치 않았는데 결국 이러한 소모사 정권은 1979년 산디노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주축이된 혁명으로 붕괴되고 만다.
이후 건설된 산디니스타 정권은 40여년간의 소모사 독재로 황폐화된 니카라과를 개혁시켜 나간다. 이들의 개혁은 놀라운 성과를 내게 되는데 특히 토지개혁은 전국민적 지지를 받게 된다.
자주적 산디노 정권의 개혁은 불평등한 토지소유를 바로 잡고 가난한 농민 가족들에게 건강과 교육, 농사와 관련된 지원을 확대 하기위해 노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니카라과의 자주적 발전은 미국에게는 큰 걸림돌로 되었던 것 같다. 중남미 국가들의 대다수가 미국의 예속적 정권 도는 친미성향의 정권인데 반해 니카라과는 민중혁명을 통한 친미 소모사 정권의 붕괴와 자주적 산디니스타 정권의 창출, 그리고 연이은 개혁조치의 성공으로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러한 니카라과 혁명의 승리가 주변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적극적으로 니카라과의 자주적 산디니스타 정권의 전복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먼저 미국은 과거 소모사 정권의 수족이었던 방위군을 콘트라(자유투사)반군으로 편제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콘트라 반군의 테러, 방화, 학살 행위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였다. 당시 산디니스타 정권이 공개 한 자료에 따르면 1981년이후 관리 910명과 민간인 8천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콘트라 반군은 미국과 레이건 대통령의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지원(예산, 무기, 군사교본, 고문관등)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국민적 지지로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산디니스타 정권이 이 내전에 치중하게 함으로써 개혁을 계속 힘있게 밀어붙이게 하지 못하게 하는데는 성공하였고 결국 이는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패하게 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로 미국은 소모사 정권때부터 지원해왔던 일체의 지원을 중단하였을 분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세계은행, 인터-아메리카 은행이 니카라과에 단한푼의 지원도 할수없게 만들어 버렸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 또한 마찬가지 였다. 소모사 독재정권 당시인 1972년 니카라과 대지진 당시 미국은 엄청난 양의 지원을 보냈으나 1988년 10월 니카라과 대지진 보다도 더욱 큰 피해를 입힌 허리케인이 니카라과를 덮쳤을 때 미국은 단 한푼의 지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제제재 또한 산디니스타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
산디니스타 정권은 안팎으로 지속된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주노선을 고수하였으나 결국 1990년 선거에서 우익세력들에게 패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미국과 콘트라 반군의 계속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1990년 선거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을 지지한 니카라과 국민이 40%에 달한다는 점이다.
<계속>


<별 첨>  미국의 요인암살 개입 연보

1949 - 김구, 한국 야당 지도자
1950 - CIA/신나치 서독에서 수많은 정치인을 사살하다
1950 - 주은래, 중국 수상, 여러차례 암살 시도
1962 -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1951 - 김일성, 북한 주석
1953 - 모하메드 모사데그, 이란 수상
1950년대 중반 - 클레로 M. 렉토, 필리핀 야당 지도자
1955 - 네루, 인도 수상
1957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1959, 1963, 1969 - 시아누크, 캄보디아 지도자
1960 - 압둘 카림 카심 준장, 이라크 지도자
1950~1970 - 호세 피구에레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두차례 암살 시도
1961 - 프랑스와 "파파독" 듀발리에, 아이티 지도자
1961 - 패트리스 루문바, 콩고 수상
1961 - 라파엘 트루지료 장군, 도미니카 공화국 지도자
1963 - 응고 딘 디엠, 남베트남 대통령
1960년대 - 피델 카스트로, 여러 차례 암살시도
1960년대 - 라울 카스트로, 쿠바 고위 관리
1965 - 프란시스코 카마뇨, 도미니카 공화국 야당 지도자
1965~66 - 찰스 드골, 프랑스 대통령
1967 - 체게바라, 쿠바 지도자, 전설적인 게릴라
1970 -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
1970 - 르네 슈나이더 장군, 칠레 군 참모총장
1970년대, 1981 -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 파나마 지도자
1972 -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 파나마 정보 사령관
1975 - 모부투 쎄세 쎄코, 자이레 대통령
1976 - 마이클 멘리, 자메이카 수상
1980~1986 -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 여러 차례 암살 시도
1982 - 아야톨라 호메이니, 이란 지도자
1983 - 아메드 드리미 장군, 모로코 군사령관
1983 - 미구엘 데스코토, 니카라과 외무부 장관
1984 - 산디니스타 국민회의의 9명의 사령관
1985 - 세이크 마하메드 후세인 파드랄라, 레바논 시아파 지도자(암살 시도중 80명 사망)
1991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지도자
1998 - 오사마 빈 라덴, 이슬람 전사
1999 -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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