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월급... 뻔한 작업... 뻔한 인생...
맞습니다. 맞고요.
먼저, 지금부터 제가 쓰는 글의 내용이, 이 포럼에 들리시는 모든 분들께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부터 해둡니다.
일부만 해당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 또 저보다 더한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프로그래머로서의 저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놀러가던 친구의 집에서 애플IIe 컴퓨터를 보고, 거기서 돌아가는 카라테카나 엘리트, 레스큐레이드같은 게임들을
보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구가 롬베이직으로 깔짝이던 수십줄짜리 코드들을 보면서 처음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컴퓨터(PC라는 말도 있기는 했지만 컴퓨터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를 살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그 친구네 집에 자주 놀러가는 방법 외에는 컴퓨터에 접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해볼 정도의 기회는
아니었지요.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대학을 두군데나 다니고도 졸업장은 따지 못할 운명이 애초에 정해져있었는지 고등학교
때는 입시 직전까지는 대학엘 가는 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요. 그 시간에 학원을 다니면서 프로그래밍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학원에 들러 한시간 정도의 저녁 강의를 듣고 혼자 두세시간 정도를 더
두들긴 후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씻는둥 마는둥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자리에 누워서 좀전에 깔짝였던
코드들을 생각해보고 뭐가 문제였을까 몇시간씩 생각하다 잠이 들곤 했었습니다.
그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학원에 고등학생은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클래스에 열 두세명 정도였던 전체 인원 중
고딩은 저 하나, 대학생이 하나나 둘, 나머지는 모두 직장인들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은 대부분 OA 코스의 일부로 수강하던
사람들이었구요. 고딩때 전 머리를 꽤 기르고 다니기도 했고 해서, 같은 클래스의 사람들은 제가 대학생쯤 되는 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역시 당연하지만 그때는 C++은 커녕 국내엔 C도 제대로 알려지기 전이었습니다. 제가 고딩 1학년때는 88년이었으니까..
제가 배웠던 것은 베이직 1개월,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포트란 2개월 코스만 줄창 들었습니다.
코볼은 뭔가 거부감이 들었고, 베이직은 인터프리팅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포트란만 계속 신청했는데요.
나름대로 눈썰미가 있었는지, 베이직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지 3일만에 프로그래밍이라는 작업의 속성을 거의 완전히
이해했었기 때문에 굳이 없는 형편에 학원에 매월 몇만원씩 싸다주면서까지 학원에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PC방이나 인터넷까페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 고등학교에 컴퓨터가 있을리도 만무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원에 가는 방법 외에는 PC를 접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습니다. 미치도록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습니다.
프로그래머라는 직종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프로그래머가 어떻게 대우를 받는지 월급은 얼마나 받는지
하루에 몇시간이나 일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지만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종일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먹고 살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면서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부모님이 없는 형편에 살림을 쪼개어 PC를 사주셨습니다.
효성에서 나온 XT 기종이었는데, 아시겠지만 XT에는 기본적으로는 하드가 없었고 플로피 드라이브 두개가 고작이었지요.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간단한 게임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고 며칠씩 게임에 빠져있기도 했습니다.
91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도 하기 전에 컴퓨터 동아리를 찾아가서 가입했습니다.
같이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필요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터보C 2.0으로 처음 C언어를 접했습니다. 학과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고 동아리방에 며칠씩 씻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거의 콜라와 담배로 연명하면서 처박혀있었습니다.
그 몇년간은 C언어에 완전히 미쳐버렸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몇가지 유틸리티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PC 통신에
올리기도 했었습니다. 나름대로는 꽤 호평을 받았던 것도 있어서, 그중 하나는 마이크로스프트웨어 지면에서 우수
공개소프트웨어라고 추천되기도 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프로그래머로서의 제 인생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과정입니다.
그 이후에도 학교를 두차례나 그만두는 등 많은 우여곡절은 있지만, 어쨌든 빼도박도 못하게 프로그래머로 발을 들여놓게
된 과정은 여기까지입니다. 너무나 깊이 빠져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저는 프로그래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뭘 말하는지 다들 눈치채셨을 겁니다. 일찍부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있었노라고 과시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보다 더 일찍 시작하신 분들도 있을거고 이정도는 자랑할 거리도 아닙니다. 또 저보다 늦게 시작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게 지금에 와서 저보다 낮게 보려는 것도 아니고요, 이 글을 쓰는 목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꿈에 대해 말하고 있거든요.
프로그래머에 있어 대박이라든지 높은 월급이라든지 그런 걸 따지게 된 것은 90년대 말쯤의 벤처 거품에 빠지면서부터입니다. 물론 벤처 열기 이전에도 프로그래머로서의 성공의 목표는 있었지만(예를 들면 이찬진이나 안철수 등)
프로그래머들이 쫓았던 것은 대박, 즉 큰 돈이 아니라 꿈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가받고
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라는 꿈이었습니다.
벤처거품이 터져버린 이후에, 문득 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저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 대박행렬에 동참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뭐, 아닌가.. 가 아니라 사실 그랬습니다. 억단위 인센티브 제공이나 코스닥 상장 어쩌구
하는 말들을 쫓아다니면서, 제 작은 꿈들은 이미 흩어지고 없었습니다. 돈이 되든 안되든 관계없이 멋진 넘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게 제 꿈이었는데요.
솔직히, 꿈이 없는 분에게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뻔한 월급... 뻔한 작업... 뻔한 인생... 이것이 현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렇게 계속 반복되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인생입니다.
첨단, 고수득, 편안한 근무환경... 현재로서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종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말 혹은 이미지에 현혹되어 이 직종에 뛰어드신 분들은, 안타깝지만 한마디로 사기당하신 겁니다.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는 단순직이고 저소득이며 열악하기 그지없는 근무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SI, 그러니까 업무용 개발만 해왔고 앞으로도 주욱 그럴 분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생각에 SI분야에 꿈은 없습니다. 쫓을 것은 오로지 돈 뿐이지요.
왜냐하면, 개발자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객사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프로그래머의 주관이나 철학은 개입될 수도 없고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프로그래머의 삶은 열악하고 힘듭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정부쪽의 정책입안자라면 쓰레기 공무원들 싹 쓸어버리고 모든 정책들을 확 갈아엎겠지만(출마하면 한표 주세요)
그런 것도 아니고, 제도 어쩔 수 없는 마찬가지의 한사람의 개발자일 뿐입니다.
사람이란, 현실이 힘들면 꿈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꿈도 찾기 힘들다면, 과감히 업종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저도 꿈이 있습니다. 별스러운 것은 아니고 흔한 꿈인데요.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는 대로 끄적끄적 혼자 작업을 해서 공개 소프트웨어로 뿌려보고, 반응이 좋으면 상용화해서
그걸로 먹고 살아보자, 뭐 그런 겁니다.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 분들도 좀 있으시겠지만요.
크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버는 정도만 먹고 살 수 있으면 그게 어딥니까.
하고 싶은 일, 애착이 가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산다는 게 그리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다른 분들도 그런 정도의 꿈은 많이들 갖고 계시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또 많은 분들은 '아니, 밤낮없이 야근에 시달리면서 그게 가능하냐'그러시겠지만...
한두달도 아니고 몇달, 몇년씩 장기간 동안계속 취미를 즐길 개인시간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그렇게 살고 계신다면, 현실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탓하셔야 합니다.
왜 그러구 사십니까. 나는 기계가 아니다, 쉴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세요.
혹 눈치밥을 먹게 된다 해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정도도 감수할 수 없습니까.
또 혹 그러다 잘릴까봐 걱정하지도 마세요. 밤낮없이 쉴틈도 없이 일해서 많은 것도 아닌 돈 몇푼 받아 연명한다면,
그게 사람이 사는 겁니까. 다른 직장을 알아보시든지, 혹은 업종을 바꾸더라도 그게 낫다고 생각되네요.
산다는 것은 결국 선택의 연속일 뿐입니다.
프로그래머를 계속 하거나 아니면 그만두고 다른 업종으로 가거나, 인생 전체로 보면 그다지 중요한 결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또 운이라는 것도 있어서, 전체적인 불황에 유독 더 힘들게 인생을 살게 되시는 분도 있게 마련입니다.
프로그래머로 살아오신 것이 저처럼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으시다면.. 힘들어도 어쩌겠습니까, 그러고 계속 살아야죠.
하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달프다, 그러면 과감한 선택도 고려해보세요.
40대에 직장에서 정리해고되어서 치킨집을 차리는 분들도 많죠.
그 직장 다니려고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짐작컨대, 오히려 치킨집을 차리는 분이 대체로 프로그래머보단 돈도 잘 버는 거 같고 더 재밌게 사시는 거 같더군요.
치킨집이 곧잘 망하기도 하지만, 뭐 프로그래머도 곧잘 회사가 망해서 나앉기도 하잖습니까.
치킨집 차릴 돈이 어딨냐구요?
그걸 나보고 어쩌라구요! ^^;;
전 치킨은 별루 좋아하지 않아서..
가끔씩은 1톤트럭 한대 사서 과일 장사나 해볼까하는 생각은 해봅니다.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제가 그런 길거리 장사에 저도 모르는 소질이 있어서 과일장사로 크게 성공하고 대형 유통회사로 키울지도요.
하지만 아직은, 지금은 저는 프로그래머이고 꿈도 있습니다.
1톤트럭은 제가 너무도 지치고 힘들어 나자빠지는 최후의 순간을 위한 히든카드이고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아직까진 지금까지 제가 프로그래머로 살아온 세월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저는 꿈을 가진 프로그래머이니까요.
여러분 님이 쓰신 글 :
: 남들 다하는 주5일근무인데도 구차하게 나와서 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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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보다 일을 두배 많이 해도 급여는 비슷비슷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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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월급받아가며 처자식 먹여 살리다가 인생 종치는 스토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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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설계를 가지십니껴? 인생이 열심히 한다고 다 잘되는건 아니잠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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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바닥에선 대박을 노리는건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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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갈켜주세요 언제까지 좋아서 야근하면서 일할순 없는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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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역시 임프님과 비슷한 과정을 겪어왔고 미치도록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서 무작정 개발하우스에 찾아가서 월급 안받아도 좋으니까 입사만 시켜달라고 조른지 1주일만에 프로그래머의 길을 처음 내딛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벌써 애기가 둘인데.... 원글쓰신분이 저랑 어떤환경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전 박봉은 아닌거 같구요...임프님 말씀처럼 열정이 없으면 이길을 걷는게 고통 그 자체가 맞는거 같습니다. 돈과 환경만 보고 하기엔 힘든직업 인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길을 안갈수가 없는건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것만은 아닌거 같습니다. 의도된데로 프로그램이 완성되었을때의 희열감, 성취감... 그게 말로써는 다 표현 못할 만큼 큰거 같습니다. 저 역시 10년 가까이 프로그램을 해 왔지만 아직도 밥먹을때, 잠을 잘려고 누웠을때, 심지어 화장실에서 까지... 안풀리는 로직을 머리속에 담고 사는거 보면... 천직이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해봅니다 ^^; 힘냅시다 ^^
(여담으로 제가 주로 지금까지 해 온게 SI쪽입니다. 지금은 20:80으로 솔루션 파트쪽으로 외도(?) 하고 있습니다만...^^ SI파트에 대한 견해는 임프님과는 조금 다르네요 ^^
물론 제가 의도한대로 프로그램을 하면 더욱더 성취감등이 크겠지만 상대방이 해달라는데로 해줘서 정말 고맙고 편하다는 소리를 들을때의 그 기분도 굉장하거든요 ^^)